1. 정작 한국어에 둔감했던 나
나는 통번역이라는 업을 삼고 있다. 매일 언어 기량을 녹슬지 않게 갈고닦아야 하는 일이다. 외국어로 밥벌이하는 사람으로서 매일 삶의 현장에서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는 언어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어의 높이뛰기』를 읽어보니 나는 외국어에 대해 민감했던 것이지 정작 내 모국어에는 둔감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져서 특정 표현 등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해당 외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 질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내 모국어인 한국어는 이러한 궁금증 없이 '다른 사람들이 다 이렇게 쓰니까'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당연하게 사용해 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에 반성도 하게 된다.
2. 타인과 대화하려면 신상정보가 필요한 한국어
책 내용 중에서 특히 공감이 되었던 챕터는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음에'이다. 한국어에서는 비즈니스에서 상대방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이름 뒤에 '부장님'처럼 직함을 붙이거나 '변호사님' 직업명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만약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직함이나 직업 정보가 없으면 이름을 알아도 말을 걸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은 사람에게 '씨'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국어로는 그 사람의 직함이나 직업명을 알아야 비로소 부르기 편해지기 때문에, 처음 만나자마자 명함을 주고받거나 서로의 나이나 직장 등 본의 아니게 신상정보를 묻게 된다는 사실에 무릎을 쳤다.
업무상 외국 고객의 이메일을 한국어로 번역할 일이 자주 있는데, 이때 난처해지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바로 호칭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보통 외국 고객이 보내온 이메일에는 이름 뒤에 직함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직함을 알아내려고 탐정처럼 단서를 찾듯이 과거에 주고받은 이메일 기록을 샅샅이 뒤져보는 일도 다반사다.
3. 회사에서는 '마이크' 되어야만 하는 비극
한국어에서는 상대방과 대화하려면 호칭부터 정해야 하고, 호칭을 정하려면 서로의 나이, 직업, 직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윗사람, 누군가는 아랫사람이 되어 위계질서가 생긴다. 이것이 활발한 소통이 요구되는 요즘 비즈니스 상황에 맞지 않다 보니, 직장 내에서 직함으로 부르는 관습을 없애고자 영어 이름까지 만들어 부르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어난다. 그러한 환경을 갖추려면 딱딱한 조직문화를 유연하게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도움이 될 것 같은 제도를 가져오다 보니 기존의 직함을 부르던 호칭 문화를 당장 타파해야 할 악습의 수준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임시방편으로 외국 호칭 문화를 들여온 셈이다. 이를 도입한 회사의 직원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상생활에서는 '김철수'로, 직장에서는 '마이크'로 두 개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호칭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예전보다 원활해졌다고 말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한국어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칭송하는 방송이나 글은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이 한국어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점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수직적인 사회에서 점점 수평적으로 바뀌어가는 사회의식을 한국어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외국 호칭 문화를 들여오지 않아도 우리나라 말로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부르며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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